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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새 하늘과 새 땅에는 새 바다가 없다고?>

◈ 마마글-마음에 쓰는 마음의 글: 믿음과 삶에 관하여 ◈

아주 어릴 때 살던 시골집 뒤에는 그리 높지 않은 산이 있고 앞쪽에는 “순지매”라고 불리던 꽤 넓은 들판이 있었다. 어린 시절 그런 마을에서 살았다. 어릴 적에 다녔던, 지금은 초등학교라고 불리는 국민학교 뒤에는 꽤 높은 산이 있었는데 대개 봄 소풍은 그 산으로 갔다. 어린 우리로서는 오르기가 쉽지 않았다. 그리고 가을 소풍은 학교에서 한 시간 정도 걸어가면 있는 서해의 한 백사장이 넓게 펼쳐진 바닷가로 갔다.

     

어린 시절 나는 그렇게 바다와 산을 끼고 수륙양서적으로 자랐다. 개인적으로 산도 좋았고 바다도 좋았다. 특히 산을 오르는 것을 꽤나 좋아했다. 친구들과 산을 오르내리면서 놀았다. 솔방울에서 씨를 빼서 먹기도 하고 노란 가루(우리가 ‘송악가루’라고 부르던 가루)를 털어서 먹기도 했다.

     

특히, 가을에는 떨어진 솔잎을 갈퀴로 긁어서 땔감을 마련하기도 하고 겨울에는 추위를 잊은 채로 눈 덮인 산에서 소리를 지르며 토끼몰이도 했다. 특별한 놀이기구나 놀이터가 없던 시골 마을에서 그렇게 산은 우리에게 즐거운 놀이터 역할을 했다.

     

그런데 군 생활을 강원도에서 하면서, 게다가 행군을 많이 하는 부대에서 하다 보니 그 후로는 산에 질려서 산보다는 바다가 좋아졌다. 원래 겨울 바다를 좋아했었다. 춥기는 하지만 차가운 바닷바람을 맞으면서 넓게 펼쳐진 백사장의 모래 위를 발자국을 남기며 걷는 기분은 참 좋다. 지금도 그런 느낌을 좋아한다. 어린 시절 백사장을 걷던 느낌과 추억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전에 요한계시록을 읽다가 적지 않게 당혹스럽게 하는 말씀을 접한 적이 있었다. 그 말씀은 이것이다.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계 21:1).

     

아! 새 하늘과 새 땅에는 새 바다가 없다는 것인가? 그렇다면 바다를 좋아하는 구원받는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적잖이 슬픈 일이 아닌가? 겨울 바다는 차치하고서라도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바다 자체를 볼 수 없는 것인가? 어떻게 그리 슬픈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이것이 요한계시록 21장을 읽으면서 물었던 물음들이다.

     

그런데 신약학자 카슨(D. A. Carson)의 책을 읽다가 그것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는 것을 읽게 되었다.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

     

“그것[새 하늘과 새 땅]은 새 하늘과 땅(a new heaven and earth)이다. 그것이 요한이 보는 것-존재하는 것의 변형(transformation of existence)-이다. 요한은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21:1)라고 덧붙인다. 바다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그것은 좀 가혹한 것처럼 여겨진다. 그렇지 않은가? 그러나 여러분이 이해해야 하는 것은 고대 이스라엘인들에게 있어서 바다는 혼돈/무질서(chaos)와 연결된다. 이스라엘인들은 해상인들(seagoing people)이 아니었다.” 이 말이 함의하는 바, 새 땅에도 바다가 있다는 말이다.

     

진정, 새 하늘과 땅에는 새 바다가 있을까? 없을까? 새 바다가 없다면 물고기들도 없을 텐데, 살아 있는 동안 산보다는 바다를, 특히 겨울 바다와 물고기들을 더 많이 봐야 할까? 아니면, ‘강이나 호수는 다시 있지 않더라’라는 말이 없으니까 호수나 강은 있겠지? 그렇다면 호수나 강의 물고기는 볼 수 있겠지? 바다 없는 영원한 삶을 상상하기가 심히 싫은데. 그 부분에 대해 무지해서 궁금함이 생긴다. 여전히 그것이 알고 싶다!

(목, November 6, 2025: secondstepⒸ2025) ※ 전에 썼던 글을 수정 보완하면서 고쳐 쓰다)

고성 금강산 앞 동해
고성 금강산 앞 동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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