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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그래서 반복해서 말하게 된다>


◈ 마마글-마음에 쓰는 마음의 글: 믿음과 삶에 관하여 ◈

전에 우리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다닐 때 학교에 데려다주고 데리고 오면서 학교에서 만나는 어떤 사람에게 복음을 전한 적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섬기면서 신앙생활을 할 것을 권유한 것이다.

     

그런데 그때 그녀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교회요? 전에 몇 번 가 본 적이 있어요. 그런데 설교가 늘 똑같은 이야기[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이야기]를 해서 재미가 없더라고요. 그래서 더 이상 안 가요.” 나중에 직장 때문에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하게 되어서 더는 볼 수가 없었다.

     

그녀는 복음의 메시지를 설교하는 것을 일종의 ‘중언부언’식의 말로 이해했다. 사전적인 의미에서 ‘중언부언’이란 말은 ‘이미 한 말을 자꾸 되풀이하는 것’을 뜻한다. 이 말은 대개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되기보다는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된다. 신약성서에서는 그 말이 마태복음 6장 7절에 단 한 번 나오는데(“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예수님은 ‘기도’와 관련하여 이것을 말씀하셨다.

     

예수님이 여기서 의도하신 것은 “이방인과 같이” 기도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방인은 기도할 때 그렇게 한다는 것이다. 그들의 신은 인격적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우상이기에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없고 또 들어줄 수가 없다. 그래서 그들의 기도가 응답받지 못하는 것은 그들의 신이 듣지 못한 것일 수 있으니 들을 수 있도록 큰 소리로 그리고 여러 번 반복해서 말하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열왕기상 18장에 나오는 갈멜산에서 엘리야와 바알 선지자들이 기도한 경우에서 그것에 대한 중요한 예를 보게 된다. 그들은 각기 제단을 쌓고 송아지를 하나씩 택하여 각을 떠서 그 위에 올려놓고 각기 자기 신의 이름을 부를 때 불로 응답하는 신을 참된 하나님으로 인정하기로 했다(24절).

     

바알의 선지자들이 먼저 자기들의 신의 이름을 부르면서 불로 응답해달라고 부르짖었다. 그러나 아무리 큰 소리로 불러도 아무런 응답이 없자 자해하면서까지 그렇게 했다. 그러나 저녁이 될 때까지 미친 듯이 떠들어댔지만 아무런 소리도 없었고 응답도 없었다(28-29절). 그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왜냐하면 실제로 바알 같은 신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바알은 인간의 필요에 따라 만들어진 우상이었고 참된 신이 아니었다.

     

반면에 엘리야는 제단 위에 번제물을 올려놓게 하고 번제물과 나무 위에 물을 부으라고 했다. 그리고 그것을 세 번 반복해서 하도록 명령했다. 그러자 제단으로 두루 흐르고 도랑에도 물이 가득 차게 되었다(32-35절). 그런 다음에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옵소서 내게 응답하옵소서 이 백성에게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그들의 마음을 되돌이키심을 알게 하옵소서”(37절)라고 기도했다. 그러자 ‘하늘로부터 하나님의 불이 내려서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또 도랑의 물을 핥았다’(38절).

     

예수님은 바알의 선지자들 같이 기도하는 것을 비판하셨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기도할 때 하나님이 듣지 못하거나 알지 못하신다고 생각이라도 하듯이 ‘한번 한 말을 다시 하고 그것도 부족한 것 같아서 또다시 하는 식으로 똑같은 말을 무의미하게(믿음과 삶과 영혼이 담김 없이) 몇 번이고 반복해서 말하지 말라’는 것이다.

     

만일 반복 자체가 문제가 된다면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로 기도하는 것은 딱 한 번만 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 이상을 하면 반복하는 것이고 그것은 중언부언의 기도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찬송할 때도 각각의 찬송을 딱 한 번씩만 불러야 하고 매번 다른 찬송을 해야 한다. 부를 찬송이 없으면 또 지어서 불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이 똑같은 찬송을 들으시느라 지루함을 느끼실 수 있기 때문이다(‘이제 그 찬송을 그만 불러라. 이제는 하도 들어서 지겹다 지겨워. 새로운 찬송가를 지어서 불러라’라고 하시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계속 하나님을 찬송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끊임없이 찬송가를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 아니면 새로운 찬송이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불러야 할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에서 ‘반복’은 전혀 부정적인 의미를 내포하지 않는다. 오히려 진심과 전 존재가 담긴 반복은 자기에 대한 가장 깊이 있는 표현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형편과 사정 그리고 우리의 필요를 잘 아신다. 그래서 어떤 때는 진심과 전 존재를 담아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은 단번에 그것을 받으신다. 반면에 날마다 같은 기도를 통해서 자기의 진심과 시간과 존재를 드리면 하나님은 그것도 기쁘게 받으신다.

     

기도는 관계이고 대화이다. 그 안에 간구가 있다. 대화의 내용은 때론 다를 수 있지만 어떤 때는 같은 내용으로 할 수도 있다. 누군가 자기의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이야기를 여러 번 한다고 해서 중언부언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의 아픔의 깊이와 정도를 느끼게 된다. 마찬가지로 자녀나 사랑하는 사람이 “사랑한다”라는 말을 여러 번 한다고 해서 ‘이제 그만해라 이제는 지겹다’라고 응대하지 않는다. 오히려 “나도 사랑한다,” 또는 “나도 사랑합니다”라고 응답한다.

     

반복이 단지 중언부언을 의미한다면 성서도 딱 한 번만 읽으면 될 것이다. 우리가 여러 번 읽으면 예수님의 귀한 말씀을 “중언부언”식의 말씀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모든 성도는 성경 읽기의 무거운 부담(?)을 덜 수 있을 것이다(실제로 대단히 불행한 현실인데 성경을 정기적으로 읽는 그리스도인은 10%도 안 된다). 평생에 딱 한 번만 읽으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설교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성경 본문 전체를 가지고 딱 한 번씩만 설교하고 말아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반복하여 설교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중언부언식의 말씀으로 격하시키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면 모든 반복이 ‘중언부언’이 되는가? 아니다. 반복의 장점은 강조와 강화 그리고 소개의 특징을 지닌다. 첫째로 반복은 강조를 의미한다. 우리는 어떤 것을 강조하고 싶을 때 여러 차례 반복하게 된다. 그럴 때 반복은 전혀 지나치지 않고 나쁘지도 않다.

     

둘째로 반복은 우리의 확신을 강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권위 있는 사람이나 전문가가 반복적으로 말하는 것을 들을 때 그와 똑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경우라면 자기의 확신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참되다고 더욱 확신하게 된다.

     

셋째로 반복은 그것에 대해서 잘 모르거나 듣지 못한 사람에게 소개하는 의미를 지닌다. 이미 누군가에게는 알고 있는 것일지라도 다른 어떤 사람에게는, 특히 그 자리에 처음 오게 된 사람에게는 생소한 것이 된다. 그래서 그것은 그 사람에게 소개하는 것이 된다. 그런 경우 그것을 들어서 알고 있는 사람은 자기가 갖고 있는 앎/지식이나 확신을 재확인받는 것이 된다. 이러한 면들이 반복의 긍정적인 차원들이다.

     

설교는 본질적으로 같은 내용, 곧 기독교 신앙과 복음의 핵심 내용인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구원 이야기를 ‘반복하여’ 말할 수밖에 없다. 설교의 일차적인 기능은 하나님의 말씀을 증언하는 것, 곧 복음을 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설교자가 성경을 떠나서 이야기할 때, 그는 스스로의 권위를 포기하게 된다”(해돈 W. 로빈슨).

     

이렇듯 성서 이야기라는 같은 내용을 가지고 각기 전달 방법을 달리하여 전하는 것이 말씀의 증언으로서의 설교이다. 그래서 설교는 내용에 있어서 근본적으로 그리고 궁극적으로 같을 수밖에 없다. 그것은 늘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의 이야기를 말한다(기독교적 삶은 이미 그 속에 담겨 있다).

     

물론 기도도 그렇지만 설교도 아무런 의미 없이 그냥 되풀이하는 것은 잘못이다. 로빈슨이 말하는 것처럼, “‘성경적인’ 설교는 아직 하나님께서 건재하게 살아 활동하시던 ‘그 옛날 좋은 시절의 예수님과 그의 사랑 이야기를’ 되풀이하는 것에 그쳐서는 안 된다. 이와 동시에 설교가 하나님에 대한 관념-정통적이기는 하나 실생활에서 동떨어진-을 되씹어 주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그러함에도 설교자가 같은 내용의 설교를 한다고 할지라도 거기에 그의 신앙과 삶 그리고 고백을 담아 전하는 것은 무의미한 것이 결코 아니다.

     

설교자가 똑같은 복음 내용을 설교하는 것이 가능함을 뒷받침해주는 성서적 근거가 있다. 베드로후서 1장 12절에서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말한다. “너희가 이것을 알고 이미 있는 진리에 서 있으나 내가 항상 너희에게 생각나게 하려 하노라.” 베드로 사도는 여기에서 그 서신의 수신자들이 이미 복음의 내용을 알고 또 그 진리에 서 있음에도 그들에게 그것을 다시 말하는 것은 “항상 생각나게 하려”고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스도인들에게 복음의 내용을 반복해서 말하는 목적은 그것을 생각나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로마서 1장 15절에서 사도 바울은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라고 말한다. 이것은 적잖이 이상하다. 왜냐하면 이미 복음을 알고 복음과 함께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다시 복음을 전한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말이 안 되는 불필요한 일을 하는 것이다.

     

바울은 로마서를 마무리하면서도 이렇게 말한다. “내가 너희로 다시 생각나게 하려고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더욱 담대히 대략 너희에게 썼노니”(15:15). 바울은 여기에서 로마서를 쓴 주된 이유가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복음에 대해 “다시 생각나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한다.

     

실제로 그리스도인들은 계속해서 복음의 이야기를 반복적으로 들어야 한다. 믿음의 견고함과 깊어짐을 위해서다. 그리고 믿음의 강화를 위해서이다. 베드로 사도의 말로 하면, 우리 안과 밖에서 복음이 생각나게 하기 위함이다. 복음에 대해서 계속 들음으로써 우리는 복음을 재확인받게 되고 또 재확신하게 된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에서 난다(롬 10:17). 그리고 그 말씀을 읽음에서 난다. “선포된 말씀”으로서의 설교도 그 역할을 한다. 하나님은 성경에 기초한 설교를 통해서 그것을 듣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시며 그들과 만나시기 때문이다.

     

오늘날 한편으로 설교는 그저 예배시간에 목회자의 (직업적인) 할 일이고 그것을 들어주는(?) 것은 회중의 할 일로 치부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설교의 무용론을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존 스토트가 말하는 것처럼 “설교는 기독교에 있어서 필수 불가결한 것이다. 설교가 없다면, 기독교의 진정성의 필수적인 부분을 잃어버린 것과 마찬가지다. 기독교란 그 본질 자체에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의 종교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설교는 중요하다. 예배당 안에 있는 불신자들에게도 그리고 신자들에게도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지는 중요한 통로이다. 예배당 안의 불신자들은 설교를 통해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믿을 수 있게 되고 신자들은 들으면서 자기들의 확신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강화하게 된다. “설교한다는 것은, 즉 ‘외치고, 전하고, 권면한다’는 의미이다”(로빈슨). 그러므로 설교자도 그리고 그의 설교를 듣는 회중도 설교를 진지하게 여길 필요가 있다.

     

하나님은 “설교를 통해 개인들과 만나시고, 그들의 영혼을 붙잡으시는 순간에는 무엇인가 장엄한 사건이 발생하게” 된다(로빈슨). 그 때문에 “설교자들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말씀을 전하기 이전에 우선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필요하다”(로빈슨). 성경이 “그것을 듣는 사람들에게 살아 있는 것”이 되려면, “그것을 설교하는 목사에게 이미 살아 있는 것”이 되어야 한다(버클리 미켈슨). 그럴 때 능력이 있는 설교가 된다. 그리고 그럴 때 하나님은 그 설교를 사용하여 사람들을 변화시키신다.

     

중언부언으로 들릴 수 있는 설교가 능력 있고 살아 있고 영향력이 있는 설교가 되려면 설교자 자신이 먼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히고 그것의 영향을 받아야 한다. 그럴 때만 청자로서의 회중이 “하나님의 진리의 풍요함 속에”(미켈슨) 들어갈 수 있게 된다. 하나님은 그것을 위해 설교자를 사용하신다. 반복적인 설교를 늘 새롭게 사용하신다.

(수, December 3, 2025: secondstepⒸ2025) ※ 전에 썼던 글을 수정하고 보완하여 고쳐 쓰다.

반복을 나타내는 썸네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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