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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함께’ 열어가는 밝은 미래: 나는 당신 안에서 나의 미래를 봅니다>

◈ 마마글-마음에 쓰는 마음의 글: 믿음과 삶에 관하여 ◈

인간은 언제나 오직 현재, 곧 ‘지금 여기’만을 산다. 그러나 그 현재는 지나가 버린 과거와 오고 있는 미래 사이에 있다. 현재에서 과거는 꿈꿀 수 없다. 이미 지나가 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래는 꿈꿀 수 있다.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나 미래는 언제나 열려 있는 가능성이다. 그런 점에서 누구에게나 미래는 공평하다. 미래는 자기가 하기 나름인 것이다. 그래서 발전적인 삶을 살려면 과거지향적인 태도보다는 미래지향적인 태도로 현재의 삶에서 과거보다는 미래를 생각하고 희망차게 맞이하는 게 더 중요하고 현명하다.

     

그러면 우리는 각자 어떤 미래를 어떻게 맞이해야 하는가? 우리가 그 미래를 최고로 맞이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그것은 현재를 최고로 사는 것이다. 그러면 최고로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에 대한 대답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밝고 행복하고 만족스러운 미래를 꿈꾸면서 그것에 맞게 현재를 가장 잘 활용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에드 쉬런(Ed Sheeran)의 아주 감미로운 노래 <완전함>(Perfect)은 한 젊은 남녀의 청순한 사랑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런데 그 사랑은 한 남자가 자신의 미래가 되기를 바라는 한 여자를 우연히 만나면서 시작된다. 그 노래의 가사 중에 이런 부분이 있다. “Just hold my hand. Be my girl. I will be your man. I see my future in your eyes.” (내 손을 잡아줘요. 내 여자가 되어줘요. 당신의 남자가 될게요. 나는 당신의 눈 속에서 내 미래를 보거든요.)

     

대단히 멋지고 놀랍게도 한 남자가 운명적으로 한 여자의 눈 속에서 자신의 미래를 본다. 자신의 미래가 그녀에게 달렸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그녀와 함께 자신의 미래를 받기를 바란다. 자신의 미래의 삶을 그녀와 공유하기를 원한다. 둘이 함께 아름다운 미래를 꿈꾸고 가꾸어가기를 바란다. 우리는 흔히 이런 만남을 ‘운명적 만남’이라고 부른다.

     

그 노래를 들으면서 나 자신에게 물었다. 인생길을 걸으며 ‘우리는 어디에서 그리고 누구에게서 우리의 미래를 보는가?’ ‘나는 어디에서 그리고 누구에게서 나의 미래를 보는가?’

     

미래를 보는 것은 희망하는 것이다. 마음의 눈으로 오늘-그것이 어떤 모습, 어떤 상황이든-이란 언덕 그 너머의 세계를 보는 것이다. 그래서 마음의 눈이 닫혀 있으면 미래를 볼 수 없고 희망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미래와 희망을 품을 수도 없다.

     

마음의 눈을 뜨고서 보이지 않는, 그러나 오고 있는 내일을 바라는 것이 희망하는 것이다. 그러할 경우 미래는 희망의 영역이 된다. 희망의 주체(그 남자에게 있어서는 그 여자)와 ‘함께’ 맞이하고 열어가는 희망의 세계다.

     

라디슬라우스 보로스(Ladislaus Boros, S.J.)는 인간을 “미래에 직면하는 존재”로 보면서 “희망은 바로 인간의 삶에 불가결한(vital) 요소의 일부다”라고 말한다. 희망 없이는 인간은 결코 삶을 이어갈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희망은 인간의 삶의 필수품이고 에너지이며 동력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처럼 미래와 희망 또는 희망과 미래는 서로 나뉠 수 없이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그래서 미래를 말한다는 것은 희망을 말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미래에 대해 가장 분명하게 가르치는 곳은 기독교 신앙이다. 왜냐하면 성서적 관점에서 하나님은 희망이시고 그것의 원천이시며 인간의 궁극적 미래는 하나님께 달려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찰스 스윈돌(Charles Swindoll)은 이렇게 말한다. “희망은 인생의 가장 힘든 시련 앞에서 힘과 용기의 근원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놀라운 선물이다.”

     

같은 맥락에서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였다가 절망적인 상황을 경험한 적이 있던 위르겐 몰트만(Jürgen Molmann)은 이렇게 말한다. “희망의 정신과 희망의 힘이 없이는 인류는 스스로 선택된 죽음 속에서 파멸할 것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을 잇는다. “희망은 신앙과 ‘떨어질 수 없는 동반자’이다…희망이 없으면, 신앙은 무너지고 약한 신앙이 되고 마침내는 죽은 신앙이 된다. 신앙을 통해서 인간은 참된 삶의 길을 생각한다. 그러나 희망만이 신앙을 이 길에 머물러 있게 한다… 또 희망은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넓게 하고 신앙을 삶 속으로 이끌어 넣는다.”

     

인간은 끊임없이 미래를 예측하고 또 현재뿐만 아니라 미래를 자기들의 지식과 기술력으로 통제하려고 하지만 그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부분적으로는 가능할지라도 전체적으로는 불가능하다. 인간에게는 그런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주님이다. 미래는 온전히 하나님께 속한다. 하나님은 역사의 주인이고 주관자이시기 때문이다. 실제로 하나님만 역사를 온전히 통제하실 수 있다. 그래서 궁극적으로 이 세상 나라는 하나님과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가 될 것이다(계 11:15). 이런 점에서 “그리스도인은 자기 앞에 절대적인 미래를 지니고 있다”라는 보로스의 말은 옳다.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희망의 하나님으로부터 자기의 미래, 곧 희망으로 가득 찬 미래를 받는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희망의 신앙인이다. 그런 이유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미래를 볼 수 있고 또 보아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 곧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골 1:13)에서 우리의 희망을 볼 수 있고 또 보아야 한다.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과 함께 그의 나라는 완성될 것이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세세토록 왕 노릇 할 것이다(계 22:5).

     

그래서 쉬런의 노랫말을 이렇게 듣는다. “Jesus Christ, just hold my hand. Be my Lord. I will be Your follower(man). I see my future in Your eyes. You’re perfect.” (예수 그리스도여, 내 손을 잡아주세요. 나의 주님이 되어주세요. 나는 주님을 따르는 사람이 될게요. 나는 주님의 눈 속에서 내 미래를 보거든요. 주님은 완전하세요.)

(토, November 8, 2025: secondstepⒸ2025) ※ 전에 썼던 글을 수정하고 보완하여 고쳐 쓰다.

삶의 토대로서의 희망을 말한다
삶의 토대로서의 희망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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