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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거기에 계신 아버지>

◈ 마마글-마음에 쓰는 마음의 글: 믿음과 삶에 관하여 ◈

전에 프랜시스 쉐퍼(Francis Schaeffer)의 『거기에 계신 하나님』 (The God Who Is There)이란 책을 의미 있게 읽은 적이 있다. 내용도 깊이가 있어서 마음을 끄는 좋은 책이지만 먼저는 그 책 제목 자체가 흥미로웠다. 그것은 나로 하나님의 ‘존재’(is/to be)의 문제와 하나님의 존재의 ‘거기’(there)성의 문제에 대해서 깊게 생각하도록 자극을 주었다(신약학자 D. A. Carson의 책 중 한 권의 제목도 그것과 같다).

     

쉐퍼는 그 책에서 신약의 기독교 및 사도들과 초기교회의 기독교로서의 역사적 기독교(historic Christianity)가 바르게 이해되고 대담하게 적용된다면 근대인(the modern man)의 딜레마들을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하나님은 존재하신다’(God exists)라는 것을 거부하는 새로운 신학과 대면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존재하신다’라는 말과 같은 의미로서 ‘하나님은 거기에 계신다’(God is there)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거기에 계신다는 것은 곧 존재한다(실존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기독교 신앙에서 ‘하나님의 거기’ 또는 ‘거기의 하나님’ 이해는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거기를 인정해야 우리의 여기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거기는 우리의 여기를 가능하게 하고 거기의 하나님은 여기의 우리를 가능하게 한다.

     

시인은 시편 139편에서 하나님의 편재성(omnipresence)으로서의 하나님의 거기와 관련하여 이렇게 노래한 바 있다.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7-10절).

     

하나님은 거기에 계신다. 그리고 우리는 여기에 있다. 하나님은 과거에 거기에 계셨고 지금도 거기에 계시며 앞으로도 거기에 계실 것이기에, 우리가 지금 여기에 있지만 장차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될 때 그분과 함께 거기에 함께 있게 될 것이다.

     

‘거기’는 ‘여기’를 확고하게 붙들어준다. 거기가 없으면 여기는 흔들린다. 폴 틸리히(Paul Tillich)의 책 제목(The Shaking of the Foundations)을 빌려 표현하면, 거기의 터전이 없으면 여기의 터전들은 근본적으로 흔들린다. 그리고 결국에는 무너지고 만다.

     

그러나 실제로 거기에 계신 하나님이 자신의 무한한 능력과 은혜로 여기에 있는 우리에게 오신다. 그것이 계시이고 임재이며 화육(incarnation)의 사건이다. 성탄, 곧 거룩한 탄생은 그런 의미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하나님의 크고 놀라운 은혜를 힘입어 우리는 거기의 하나님이 여기에 있는 우리 가운데로 오셔서 함께 해 주심으로써 하나님의 거기를 하나님의 여기로, 거기의 하나님을 여기의 하나님으로 만나게 된다. 지금은 하나님의 성령을 통해서 그런 만남을 같고 영적 관계를 형성한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하나님 임재 경험이다.

     

거기의 하나님이 여기의 하나님으로 우리와 함께하신 이 모범은 부모들인 우리가, 특별히 아버지인 우리가 자녀들과 관계를 맺는 삶에 대한 중요한 모범을 제공해 준다. 그러한 삶의 중요한 예를 맥스 루케이도(Max Lucado)와 그의 아버지의 관계에서 찾아볼 수 있다.

     

루케이도는 어느 아버지날에 삼십일 년 동안 함께했던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아버지 없이 맞이하는 첫 번째 아버지날에 아버지를 회상하면서 그에 관해 이야기한다. 그의 말로 생각해 보면, 그의 아버지는 참 멋진 아버지였던 같다.

     

루케이도는 자신의 아버지가 최고의 아버지 중의 한 분이었다고 회상한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필요로 할 때는 언제나 ‘거기’에 있었다고 말한다. 그에게 있어서 아버지는 위로의 근원이었고 예측가능한 그의 삶의 일부였다. 여자 친구들이 왔다가 떠나갈 때 그의 아버지는 거기에 있었고 풋볼 시즌에는 거기에 있었다. 여름휴가나 다른 모든 활동에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그의 아버지가 거기에 함께했다는 것이다. 그에게 아버지는 늘 ‘거기에 계신 아버지’였다.

     

그의 아버지는 그에게 면도하는 법과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주었고 주일학교를 위해 성구를 암송하는 것을 도와주었으며 나쁜 짓을 하면 처벌받고 정직하게 행하면 보상받는다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그의 아버지는 일찍 일어나는 것과 빚을 지지 않고 사는 삶의 중요성에 본이 되어 주었다. 그의 아버지는 그에게 몸소 균형 잡힌 삶을 보여주었다. (A. Gray)

     

루케이도는 그의 아버지가 ‘거기’에 있었기 때문에 삶이 평온하게 진행되었다고 말한다. 그의 아버지는 유별난 것을 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라면 누구나 해야 하는 당연한 것을 했다고 말한다. 바로 물리적으로 그리고 정신적으로 함께 ‘거기에 있는 것’ 말이다.

     

거기에 계신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거하심으로 하나님의 거기가 하나님의 여기가 되게 하신 것처럼 그리고 루케이도의 아버지가 그가 필요로 하는 곳에 항상 있었던 것처럼, 아버지들도 그러면 얼마나 좋을까? 거기에 계신 하늘 아버지는 항상 계셔야 할 거기에 계신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거기에서 ‘거기에 계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

     

그러나 거기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오심과 함께 ‘여기’가 된다. 그러나 여기는 결국 ‘거기’로 바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 14:1-3)

     

거기에 계신 하나님을 여기에서 만나면서 아버지로서의 나도 자녀들에게 거기에 있는 아버지가 되어 주고 싶다. 이제는 그들이 장성하여 우리 곁을 떠나가고 있기에 아주 많이 늦었지만 내가 여기 이 땅에서 존재하는 한에서 그렇게 되어주고 싶다. ‘거기에 있지만 또한 여기에 있는’ 아버지로서 그렇게 해 주고 싶다.

(월, November 24, 2025: secondstepⒸ2025) ※ 전에 썼던 글을 수정하고 보완하여 고쳐 쓰다.

거기와 여기 이정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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