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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훈련이 가능하게 한다>

◈ 마마글-마음에 쓰는 마음의 글: 믿음과 삶에 관하여 ◈

어떤 일이나 분야에서 의미 있는 성취를 이룬 사람들에게는 공통된 요소들이 있기 마련이다. 그중 하나는 ‘훈련’(discipline)이다. 그런데 훈련(단련)은 매우 무게가 있는 말이다. 그것은 절제와 노력 그리고 힘든 과정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훈련 또는 단련이란 말을 들으면 우리는 대개 운동선수나 군인 같은 사람들을 연상하게 된다. 그들은 대개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특정한 목표를 정하고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서 절제하면서 힘든 훈련을 통해 자신들을 단련한다.

     

하지만 훈련은 비단 운동선수나 군인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분야에서의 의미 있고 탁월한 성취와도 관계가 있다. 그런 이유로 그것은 신앙생활 곧 영적 형성에도 적용된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train yourself to be godly)”(딤전 4:7).

     

훈련은 나아갈 방향과 목표를 정하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그 모든 과정에 충실하면서 자기를 헌신하는 지속적인 노력이다. 훈련은 전념하는 것이고 그런 훈련을 통해 특정한 목표가 성취된다. 이런 점에서 훈련은 ‘적합성’과 밀접하게 관련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훈련은 어떤 것이나 어떤 사람을 이루고자 하는 특정한 목적이나 목표에 계속해서 적합하게 맞추어 가는 것이다. 그 과정에는 부족한 것을 보충하고 바로 잡는 ‘교정’과 잘되고 충분한 것을 지속되고 더 나아지게 하는 ‘강화’가 병행된다.

     

각 분야에는 훈련과 관련하여 모범이 되는 사람이 많이 있다. 그들은 그 분야에서 탁월한 성취를 이루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귀중한 본보기 역할을 한다. 그들은 그 분야에서 소중한 인적 자산들이다. 그들은 당연히 존중받을 만한 가치가 있고 또 그들의 노력과 성취에 대해 존중받아야 한다.

     

전 역사적으로 볼 때 그리스도인 중에도 그런 사람이 많이 있다. 그런 사람 중에 목회자요 신학자인 유진 피터슨(Eugene H. Peterson)이 있다. 그는 잘 훈련된 사람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리스도인으로서 훈련된 삶에 대한 좋은 모범 중 하나이다. 그는 대학교에 다닐 때 뛰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매일 이른 아침이나 늦은 오후에 운동장 트랙을 달렸을 뿐만 아니라 늘 운동화를 신고 다녔고 대학교정을 빠르게 지나다녔다.

     

유진 피터슨은 대학에서 영어를 전공했는데, 특히 작문 기술을 발전시키려고 열심히 공부했다고 한다. 대학원에 다닐 때는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통달했고 신학교에서 성서 원어를 가르치기도 했다. 목회할 때는 교인들과 함께 성경 공부를 개발하고 열정적으로 가르쳤다.

     

그뿐 아니라 사람들이 성경의 진짜 의미를 알도록 돕기 위해 성경을 현대 영어로 번역했는데(신약을 먼저 번역하고 후에 구약을 번역했음),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물론이고 많은 비그리스도인도 알고 있는 “메시지”(the Message)가 바로 그것이다. 그의 수고와 헌신으로 인해 오늘날 사람들이 성경을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면 그는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사람들 대부분이 할 수도 없고 또 해보려는 생각조차 하지 않는 상황에서 무엇이 또는 어떤 동력이 그를 움직인 것일까? 그에게는 성공에 대한 강력한 소원이 있었고 언어를 좋아했다. 자기의 주님께 헌신이 되어있었다. 발견의 전율이 있었고 창조적인 정신과 더불어 빛나는 지성도 있었다.

     

물론 하나님이 주신 재능도 있었다. 분명히 이 모든 것은 그가 이룬 것들의 토대가 되었다. 그러나 거기에는 또 다른 중요한 요소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훈련’이다. 그에게는 ‘훈련의 신학’(theology of discipline)이 있었고 “그는 그것을 글쓰기, 목회 그리고 번역뿐만 아니라 달리기에도 적용했다”(D. Demaray/R. Johnson).

     

유진 피터슨은 훈련을 통해 자기 분야에서 자기가 원하는 것을 이루어갔다. 비록 훈련의 과정은 어렵고 힘들었으나 그는 그 과정을 통해 능력을 얻게 되었다. 훈련은 결국 그에게 자유로움을 가져다주었다. 이처럼 그는 훈련된 사람이며 그의 삶의 영역들은 훈련과 나뉠 수 없다. 그가 이룬 성취들은 분명 훈련을 통해서 가능하게 되었다.

     

사람에 따라 훈련을 이해하는 것이 다를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신앙생활과 관련하여 훈련을 부정적으로 보는 경우가 있다. 그것은 성령의 내적 역사와 맞지 않을 뿐만 아니라 성령의 역사를 방해하며 인위적으로 자기를 조절하는 것이라고 여기기도 한다.

     

그러나 훈련은 그렇게 부정적이지 않다. 오히려 그것은 신앙생활에서도 중요한 면이다. 그래서 엘리자베스 엘리엇(Elisabeth Elliot)은 각각 이렇게 말한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인들이라면 우리는 은혜 아래에 있다. 우리는 은혜에 의해서 훈련받는다.”

     

같은 맥락에서 테리 M. 무어(Terry M. Moore)도 각각 이렇게 말한다. “훈련은 우리가 변화를 가져오기 위해서 따라야 하는 어떤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우리의 이웃에 대한 사랑 안에서 자라도록 돕는 수단으로서 우리에게 은혜의 훈련들[기도, 하나님의 말씀, 예배, 홀로 있음(solitude), 드림, 금식,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침묵하기]을 주셨다.”

     

이처럼 일반적인 면에서 훈련은 자기가 품은 어떤 것을 위해 자신을 그것에 적합하게 맞추어 가는 것이다. 그래서 훈련의 결과는 그것에 대해서 자유로움을 얻는 것과 일정한 결실을 얻는 것이다. 누구나 자기 인생에서 무언가를 이루고자 한다면 훈련은 필수적이다. 재능이나 능력이 부족한 사람이라면 더욱더 그렇다.

     

영적인 면에서 훈련은 은혜의 한 면이고 은혜의 수단이다. 은혜는 훈련을 통해서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 그렇게 영적 형성을 위한 영적 훈련은 중요하면서도 필수적이다. 따라서 우리가 영적으로 잘 형성되려면 훈련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여러 영적 훈련을 실천해 갈 필요가 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이렇게 말했다. “육체의 연단(physical training)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godliness)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딤전 4:8).

     

훈련은 많은 것을 가능하게 한다. 그러나 훈련은 힘든 과정을 수반한다. 그런 이유로 많은 사람이 아예 시도조차 하지 않거나 중도에 포기하곤 한다. 하지만 잘 헤쳐 나가기만 하면 탁월한 능력을 지닐 수 있게 된다. 훈련은 그것을 시도하는 사람을 결코 실망하게 하지 않는다. 그래서 훈련은 끝까지 해 볼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다.

(월, December 1, 2025: secondstepⒸ2025) ※ 전에 썼던 글을 수정하고 보완하여 고쳐 쓰다.

달리기 훈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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