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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성취와 생의 만족>

인간의 삶은 유한하다. 인생의 기간은 정해져 있어서 모든 인간은 언젠가는 이 세상을 떠나야 한다. 그래서 인간은 살아갈수록 너나 할 것 없이 필연적으로 인생의 무상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삶이 허무하다는 감정은 모든 인간이 시시때때로 직면하는 실존적인 문제이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그리고 죽음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더욱 그렇다.

     

그러면 삶은 허무하기만 한가? 아니면 의미도 있는가? 아무리 애쓰고 노력해도 결국에는 한 줌의 재가 되어 흙으로 돌아가는 게 우리의 인생인데, 그런 실존적 상황에서 우리는 의미를 추구하면서 살아야 하는가? 아니면 되는대로 대충 살다가 사라지는 것이 현명한가? 그것에 대한 견해와 대답은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오래전에 두 사람이 두 가지 견해를 대변하는 서로 대조적인 시조를 지었는데, 그것들은 바로 <하여가>와 <단심가>이다. <하여가>는 후에 조선의 태종이 된 태조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이 고려 시절에 포은 정몽주를 회유하기 위해서 지었다고 전해지는 시조이다. “이런들 또 어떠하며 / 저런들 또 어떠하리. 성황당의 뒷담이 / 무너진들 또 어떠하리 / 우리도 이같이 하여 / 죽지 않은들 어떠할까.”

     

반면에 이에 대해 정몽주는 <단심가>를 지어 거절의 뜻을 전했고 결국 이방원의 두 부하에 의해 선지교에서 처참하게 죽임을 당했다. <단심가>의 내용은 이렇다. “이 몸이 죽고 죽어 / 일 백번 고쳐 죽어 / 백골이 진토되여 / 넋이라도 있고 없고 /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 가실 줄이 있으랴.”

     

성서에도 인간의 삶의 허무함을 다루는 곳이 있는데 바로 전도서이다. 전도서는 생의 허무함과 의미의 문제를 다룬다. 그러나 전도자는 생의 허무함과 마주하면서도 하나님 안에서의 생의 기쁨과 만족에 관해 이야기한다. “사람이 먹고 마시며 수고하는 것보다 그의 마음을 더 기쁘게 하는 것은 없나니 내가 이것도 본즉 하나님의 손에서 나오는 것이로다”(2:24).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 근심하고 수고하는 것이 아무런 소득이 없이 슬픔뿐이지만 그런 중에서도 기쁨을 주는 것도 있다고 한다. 하나님의 손으로부터 나오는 것으로서 먹고 마시는 것이다.

     

실제로 사람에게 먹고 마시는 것은 큰 즐거움 중의 하나이다. 흔히 하는 말로 먹는 즐거움이 없다면 삶의 즐거움은 많이 줄어들 것이다. 물론 그렇게 되려면 그것을 얻기 위한 수고를 하지 않을 수 없지만, 먹고 마시고 수고하는 것을 통해서 그리고 수고하고 먹고 마시는 것을 통해서 비록 그것이 일시적일지라도 어느 정도 우리 마음과 삶의 기쁨을 얻을 수 있다.

     

그뿐 아니라 인간은 마음 깊은 곳에서 원하는 것을 추구하며 살 때 생의 활력을 느끼며 삶의 만족과 행복도 누릴 수 있다. 인생의 만족과 행복감은 생의 의미처럼 우리의 삶에 힘과 활력을 제공한다. 게다가 그러한 삶을 살아가야 인생의 황혼 녘에 후회를 줄일 수 있다.

     

전에 인생의 후반부에 접어드는 분과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그는 그 나이 때쯤에 이른 사람들 대부분, 아니 거의 모두가 갖게 되는 마음 상태인 인생의 허무함과 공허함을 느끼는 것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는 대화 중에 이런 말을 했다. “이 나이를 먹고 보니, 시간이 너무 빨리 흘렀고 인생이 참 허무하게 느껴지네요. 인생에 남은 게 거의 없는 것 같아서 슬퍼집니다. ‘내가 무엇을 하면서 살았나?’하는 서글픈 마음이 생기네요. 시간이 이렇게 빠르다는 것을 젊을 때 깨달았다면, 아마도 인생을 다르게, 더 의미 있고 풍성하게 살았을 텐데요.” 그래서 이렇게 물었다. “젊었을 때는 왜 그런 것을 생각하지 못했죠?”

     

나의 질문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때는 인생이 늘 젊을 것 같았죠. 게다가 하고 싶은 것들을 마음껏 하고 즐기면서 살고 싶었죠. 당시에는 믿음도 없었거든요. 더욱이 그 당시 제 주변에 삶의 목적, 삶의 의미 그리고 삶의 방법과 같은 인생철학에 관해서, 곧 어떻게 사는 것이 좋은 것인지에 대해 말해 준 사람이 아무도 없었거든요.” 그래서 나는 이렇게 대꾸했다. “왜냐하면 자기들도 잘 모르니까요. 게다가 그런 것에 대해 깊게 생각하면서 살지도 않았기 때문에 그럴 겁니다.” 그러자 그는 “그렇다”라고 말했다.

     

오래전에 인간 발달 전문가 로버트 J. 해비거스트(Robert James Havighurst, 1900-1991)는 인간이 살아가면서 각 연령대에 달성해야 할 발달 과업들(developmental tasks)을 제시한 바 있다. 동시대에 살았던 대니얼 레빈슨(Daniel Levinson, 1920-1994)과 에릭 에릭슨(Eric Erikson, 1902-1994) 같은 발달심리학자들도 자신들의 연구를 바탕으로 발달 과업과 관련된 이론을 제시했다.

     

특히, 심리사회 발달(psychosocial development)을 주창한 에릭슨은 인간의 발단 단계를 여덟 단계로 구분해서 제시했는데, 그에 따르면 인간의 발달은 각 단계를 거쳐 상반되는 두 방향 중의 한 방향으로 발전에 가게 된다. 그의 여덟 단계 중 마지막 단계는 “통합”(integrity) 대 “절망”(despair)인데, 이 단계는 한 사람이 삶에 관해 느끼는 성취 또는 성취의 결여에 초점이 맞추어진다.

     

삶이 건전한(healthy) 방향으로 진행된 통합된 사람(the integrated person)은 자기가 이루어온 것을 토대로 자기 삶에 대해 만족감을 갖게 된다. 하지만 삶이 건전하지 못한(unhealthy) 방향으로 진행된 절망하는 사람(the despairing person)은 자기 인생을 돌아보면서 성취하지 못한 것에 대해 후회하게 된다.

     

이같이 인간 발달 전문가들이 말하듯이 인간의 삶에는 일생(life span)에 걸쳐 각각의 연령 단계에 맞게 달성해야 할 과업들이 있는데(그것은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 의도/계획하신 것들일 것임), 그것은 인간의 책임뿐만 아니라 인간의 삶의 만족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인간은 각 연령 단계에 맞는 발달과업을 충실히 수행하고 달성해 감으로써 생의 만족을 누리며 살게 되고 인생의 뒤안길에서 후회를 줄일 수 있게 된다. 인생의 허무한 마음을 줄 일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생계를 위해서나 가족 부양을 위해서 해야 할 일을 하면서 살아가되 마음의 소원을 따라 하고 싶은 일들을 하면서 살 필요가 있다(그 두 가지가 같은 사람은 정말로 행복한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분명 행복한 사람이고 자기가 하는 일을 통해서도 생의 만족과 행복을 느낄 것이다. 만일 자기가 하는 일을 통해 만족감을 얻지 못하고 있다면, 그러한 만족감을 줄 수 있는 일을 병행하면서 살든지, 아니면 하는 일을 중단하고 그런 일을 찾아보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그래야 나중에 후회를 덜 수 있다.

     

우리의 발걸음은 우리가 계획하는 만큼 간다. 우리 마음의 발걸음은 우리 마음이 꿈꾸는 만큼 간다. 우리의 삶은 우리 시야의 넓이만큼 확장되고 우리 꿈의 크기만큼 펼쳐진다. 우리 인생은 우리가 기대하는 만큼 열린다. 우리의 기대가 우리 인생의 만족의 분량과 정도를 결정한다. 우리의 미래는 우리가 바라고 노력하는 만큼 우리에게 준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는 것이다. 큰 꿈을 품어라(Dream big). 큰일을 생각하라(Think big). 야망을 품어라(Be ambitious). 네 꿈을 펼쳐라(Follow your dream). 실제로 그렇게 하면서 살아가면 자기 삶에 나름의 만족감이 있을 것이다. 행복하게 될 것이다.

(토, November 15, 2025: secondstepⒸ2025) ※ 전에 썼던 글을 수정하고 보완하여 고쳐 쓰다.

성취와 생의 만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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