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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신앙, 하나님 앞에 개인적으로 서는 것>

◈ 마마글-마음에 쓰는 마음의 글: 믿음과 삶에 관하여 ◈

전에 자주 보게 되던 한 원주민 여성에게 복음을 전한 적이 있다. 그녀는 내 또래의 사람으로 성품이 착하고 성실했다. 어느 날 나는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종교가 있느냐”고 물었고 그녀는 자기 조상들의 신을 믿는다(totemism)고 대답했다. 그래서 나는 “당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인생길을 걸어가면 좋겠다”라고 말하면서 전도했다. 그런데 그녀는 자기 가족들은 그리스도인이지만 자신은 예수를 믿고 싶지 않다고 했다.

     

나는 그 이유를 알고 싶었다. 그래서 “왜 그러느냐?”고 물었더니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기독교는 백인들의 종교이고 그들은 이 땅에 들어와서 우리 조상들의 땅을 빼앗았으며 게다가 수없이 많은 사람을 죽였다. 그 때문에 그런 사람들의 신을 믿고 싶지 않다.” 그 말을 듣고 나니 별로 할 말이 없었다. 그래서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다음 두 가지를 말했다.

     

첫째는, “기독교는 백인의 종교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복음이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전 인류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이 세상에 보내주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시고 부활하게 하신 인류의 유일한 구원자이다”라고 말했다. 게다가 이곳에 왔던 유럽인 정복자들이 모두 그리스도인들이었던 것은 아니라고 말해주었다.

     

둘째는, 그녀가 “언젠가 생각을 바꾸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믿고 섬기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진심으로 그러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그녀가 이 세상을 떠나가기 전에 그녀의 가족들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그분을 위해 살다가 죽기를 바란다.

     

다른 한편으로 오래전에 어떤 남자 청년으로부터 이런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자기 친구 중의 한 사람이 교회를 다니다가 사람들에게 상처받고 신앙생활을 그만두었다고 한다. 교인들의 좋지 못한 면들과 신실하지 못한 면들을 보면서 더 이상 신앙생활에 의미를 느끼지 못해서 교회를 떠났다는 것이다. 그렇게 말하는 친구에게 무슨 말이라도 해줘야겠는데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좀 알려달라고 했다.

     

그때 그에게 말해주었던 이야기 중에 두 가지가 명확하게 기억이 난다.

하나는 그리스도인들 모두가 완벽하게 하나님을 섬기면 좋을 텐데 그들도 사람이고 여전히 죄성을 지니고 살아가기에(변명이나 정당화의 차원은 절대로 아님) 잘못도 하고 실수도 한다. 게다가 사람들 보기에 좋지 않은 행동도 한다. 그것을 솔직하게 인정하라고 했다. 그렇지만 신실하게 믿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친구에게 ‘네가 그런 사람이 되어주면 누군가에게 좋겠네’라고 말해주라고도 했다.

     

다른 하나는 한 가지 예를 들어 설명했다. 어떤 장성한 아들이 있다고 하자. 그는 자식인 도리로서 부모님을 잘 섬겨야 하는데 다른 형제자매들이 부모님을 잘 섬기지 않는 것을 보고는 화도 나고 상처받기도 해서 그것을 핑계로 자신도 부모님을 섬기지 않는다면 그것이 바른 것이냐고 물으라고 했다.

     

부모님을 섬기는 것은 자식으로서 당연히 해야 하는 것이지 다른 형제자매가 하는 것을 보고 잘하면 자기도 잘하고 그들이 잘하지 못하면 자기도 못해도 되는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이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것은 자신을 지으신 창조주에 대한 인간으로서 당연히 해야 하는 것이지 다른 사람들이 하는 것에 근거해서(또는 다른 사람들이 하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

     

물론 예수님이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고 말씀하신 것처럼, 그리스도인들은 착한 행실을 해야 한다. 그리고 베드로 사도가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이 그리스도인들을 자기 백성으로 삼으신 것은 그들을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하나님 자신]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는 것이다(벧전 2:9).

     

이처럼 모든 그리스도인이 그러한 모범적인 삶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한다면야 더 바랄 것이 없겠지만 그렇지 못하는 것도 사실이기 때문에 인정하면서 그렇게 되도록 노력할 필요가 있다.

     

그 청년은 내 말을 듣고 난 다음에, “명쾌한(?) 설명을 해 주어서 감사한다”라고 하면서 자기 친구에게 그렇게 말하겠다고 했다. 그 이후로 어떻게 되었는지는 잘 모른다.

     

믿음은 하나님과의 일대일의 관계이다. 한 개인이 주변과 상관없이 하나님 앞에 단독자로 서서 그분과 관계를 맺는 것이 믿음이다. 인격주의 철학자 마틴 부버(Martin Buber)의 용어로 말하자면, 신앙생활이란 인격적인 “당신”(Thou)으로서의 창조와 구원의 주이신 하나님을, 인격적인 “나”(I)로서의 피조물인 한 인간이 그분 앞에 단독자로 서서, 개인적으로 서서 전인으로 하나님께 응답하고 섬기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신앙은 나와 하나님과의 절대적인 관계이지 죄와 사망 가운데 있는 다른 일개 인간을 통한 나와 그분과의 관계가 아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의 특성이다.

     

그리고 그런 믿음을 토대로 공동체에 속하게 되고 그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개인과 공동체가 되어야 함이 바람직하다. 이 점이 간과되면 우리는 결코 믿음의 세계로 들어갈 수 없게 된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은 완전하지 않기 때문이고 그래서 그리스도인들도 모두 결점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 하나님이 인간 스스로는 능력 부족으로 해결할 수 없는 죄와 사망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 독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주셨다. 그것을 믿는 신앙이 기독교 신앙이다. 우리는 역사적 사실로서의 그분의 탄생을 성탄일로 기념하고 있다. ‘인간 역사 속의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이 ‘각 개인 존재 속의 영적 탄생’으로 이어져 모두 영원한 세계를 품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의도이고 바람이다. 그런 삶은 복되다.

(월, November 24, 2025: secondstepⒸ2025) ※ 전에 썼던 글을 수정하고 보완하여 고쳐 쓰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상 앞에 선 어떤 사람
그리스도의 십자가 상 앞에 선 어떤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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