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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첫 번째 걸음과 두 번째 걸음: 기적과 일상의 복합체로서의 삶>

◈ 마마글-마음에 쓰는 마음의 글: 믿음과 삶에 관하여 ◈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첫 번째 취해지는 자세는 ‘눕혀지는 것’이다. 그 점에서는 누구도 예외가 없다. 그리고 태어난 인간이 마지막으로 취해지는 자세도 ‘눕혀지는 것’이다. 그 점에서도 누구도 예외가 없다. ‘눕혀짐’이 인간의 첫 번째 자세와 마지막 자세이다.

     

그런데 그것은 스스로 하거나 할 수 있는 능동적 행위가 아니다. 다른 사람에 의해서 행해지기에 수동적이다. 갓난아이는 살아 있어도 그럴 능력이 없고 죽은 사람은 죽어 있기에 움직일 수가 없다. 그렇게 인간은 근본적으로 의존적이다. 그래서 인간은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이 세상에 올 때도 그리고 이 세상을 떠나갈 때도 생명과 인간다움을 유지할 수 없다.

     

태어나 눕혀진 인간은 음식을 통해 성장에 필요한 에너지를 얻는 일정 기간이 지나면 스스로 눕혀진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말 그대로 정말로 ‘끙끙대면서’ 젖 먹던 힘까지 발휘하여 뒤집기를 시도한다. 그렇게 수많은 시도와 실패를 거치다가 어느 날 드디어 뒤집기에 성공한다. 스스로 노력해서 자기 인생 최초의 성공을 이룬 정말로 값진 경험을 하게 된다. 자기 인생에서 처음으로 말로 다 형용할 수 없는 성취감을 맛보게 된다. “그래, 인생이란 이런 거야. 노력하면 안 되는 일이 없는 거지. 나의 능력과 노력으로 할 수 있는 거야.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을 말이야.”

     

그 후에는 아무리 눕혀 놓아도 스스로 뒤집고는 여기저기 기어 다닌다. 자기 인생의 지경을 조금씩 넓혀 가는 것이다. 기어 다니면서 자기가 원하는 것과 자기 마음을 사로잡는 것들을 하나둘 붙잡기 시작한다. 호기심과 소유욕의 발로이다. ‘내가 손대는 것은 다 내 것이야!’라고 말하듯이 외부 세계와 접촉하면서 소유 본능을 충족시켜 간다. 그렇게 힘들게 붙든 것을 누가 빼앗기라도 하면 울부짖는다. ‘감히 내가 잡은 내 것을 누가 건드려. 내놔’라고 표현하듯이 말이다.

     

그리고 그렇게 여기저기를 기어 다니다가 어느 날 앉게 되고 그 후에는 붙잡고 일어설 것을 찾다가 눈에 띄는 것을 붙잡고 일어서기 위한 노력을 한다. 그렇게 시도하면서 주저앉고 쓰러지는 과정을 반복하다가 드디어 어느 날 두 다리에 힘을 꽉 주고서 일어서서 굳게 버티고 서 있게 된다. 또 한 번의 놀라운 성취를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다음 세상을 다 얻은 듯 씽끗 웃는다. “성공이야 성공. 드디어 내가 해냈어! 나 자신이 자랑스럽고 대견해”라고 외치듯이 말이다. 그리고는 한 발을 앞으로 내디딘다. 물론 넘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것도 몇 번 시도하다 보면 곧 그렇게 될 테니까.

     

아기가 스스로 일어서서 한 걸음을 내디디는 것이 때가 되면 다 하는 것처럼 여겨질지 몰라도 그것은 분명 하나의 ‘기적’이다. 그것은 인생에서 첫 번째 기적이다. 아기가 걸을 수 있기 전에는 걷는 것이 아직 실현되지 않은 하나의 가능성에 불과하다. 그러나 일어서서 한 걸음을 뗌으로써 가능성이 현실이 되는 것이다.

     

이 기적 행위는 학습되어 아이의 뇌에 각인되고 다시 시도하게 된다. 그리고 다시 한 걸음을 내디디고 넘어지는 과정을 거듭하다가 드디어 한 걸음을 내디딘 다음에 두 번째 걸음을 내디디고 서게 된다. 그런 다음 다시 한 걸음을 뗀다. 비틀거리면서 앞으로 나아간다. 가다가 넘어지더라도 전진한다. 그런 과정을 반복하다 보면 잘 걷게 되고 그렇게 해서 걷는 것은 일상이 된다. 그때부터는 그냥 생의 평범한 한 과정이 된다. 그것은 오랜 시간과 수고를 통해 이루어낸 쾌거이다.

     

아기에게 첫 번째 걸음은 대단히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 첫 번째 걸음에는 가능성으로서의 두 번째 걸음을 포함한 일상으로서의 모든 걸음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첫 번째 걸음을 성공하게 되면 적잖은 노력이 필요하지만 두 번째 걸음부터는 당연한 것이 된다. 퇴행이 되는 일은 결코 없다. 그것은 비가역적이다.

     

첫 번째 걸음이 진정 놀라운 기적이라면 두 번째 걸음과 그 이후의 걸음은 아주 평범한 일상이다. 우리 인생은 기적을 바탕으로 한 일상적인 삶으로서의 걸음걸음으로 채워진다. 그리고 그렇게 일상으로서의 걸음은 어느 날 우리의 몸에 기력이 쇠하고 다리에 힘이 빠지거나 문제가 생기게 되면 걸음을 멈추어 서게 된다. 그리고 앉게 되고 다시 눕게 된다. 스스로는 불가능하기에 다른 사람이 일으켜 줘야 앉을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어느 날 생의 기운이 다하게 되면 시들고 죽게 되어 다른 사람에 의해 다시 눕혀지게 된다.

     

물론 일상, 곧 두 번째 걸음과 그 이후의 모든 걸음에도 분명 기적 같은 일들이 있다. 우리의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일만 있는 게 아니라 기적 또는 은혜라고 여겨지는 것들이 있다. 그것들은 인간의 노력과 상관없는 또는 인간의 노력으로 될 수 없는 오직 자기가 아닌 외부로부터 특별하게 주어지는 것이다. 우리가 그것을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우리는 모두 그것을 경험하며 산다. 신앙의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하나님의 개입과 역사적 행위의 결과이다. 하나님의 전적인 뜻과 행위로 이루어지는 은혜이다.

     

인간이 걷을 수 있게 된 후에 세상을 걸어 돌아다니면서 하는 일은 아기 때 기어 다니면서 했던 일 곧 붙잡는 행위이다. 계속해서 자기가 원하는 것을 손에 넣고 손에 쥐는 것이다. 그것이 인생의 과정이다. 어떤 사람은 걸어 다니면서 권력을 붙잡는다. 어떤 사람은 지식을 붙잡는다. 어떤 사람은 물질을 붙잡는다. 어떤 사람은 쾌락을 붙잡는다. 어떤 사람은 명예를 붙잡는다. 그러다가 결국에는 이 세상을 떠나게 될 때 자기 몸의 크기만 한 빈 관에 이 세상에 올 때의 모습인 빈손으로 눕혀진다. 그가 기어 다니며 이것저것 붙잡기 전에 눕혀져 있을 때처럼 아무것도 쥐지 않은 빈손으로 말이다.

     

그러면 본래 눕혀졌고 또 마침내 눕혀지게 될 인간이 일어서서 세상 여기저기를 걸어 다니게 될 때 붙잡아야 할 것 중 최고의 것은 무엇인가? 그런 것이 있기는 한가? 모든 것이 상대적이라면 이런 물음은 전혀 의미가 없는 게 될 것이다. 더욱이 이 물음에 대한 답은 각자 자신의 세계관과 인생관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그러나 성서적 관점에서는 단연 창조의 주 하나님이다. 구원의 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마 4:10)라고 말씀하셨고 사도 바울은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빌 3:12)라고 말했다.

     

아이가 태어나 기어 다니다가 일어서 걷게 되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것이다. 그리고 평생 걸어 다니면서 이것저것 붙잡게 되는 것도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것이다. 하나님이 손을 내밀 때 그것을 붙잡으면 하나님께 붙잡힌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손을 내밀 때 그것을 붙잡으면 예수 그리스도께 붙잡힌다. 보혜사 성령 안에서 그렇게 된다. 보혜사 성령은 우리를 변화시키고 지도하시는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붙잡고 그래서 하나님께 붙잡힌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붙잡고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 붙잡힌 사람은 자기 인생의 목적을 “하나님의 영광”에 둔다. 자기 인생의 초점을 자기를 지으시고 구속하시는 하나님께 맞춘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고 권면한다. 그것은 모든 그리스도인-근본적으로는 모든 인간-의 삶의 목적이어야 한다.

     

본래 흙(먼지)에서 온 인생이 흙으로 돌아가기 위해 눕혀지기 전에 하나님을 붙잡지 못하면 그리고 하나님께 붙잡히지 못하면 인생은 결국 허무하게 끝이 나고 만다. 왜냐하면 하나님만이,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만이 모든 것이 되시고 또 눕혀지고 눕혀질 인간을 궁극적으로 붙잡고 일으켜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붙잡는 것은 모든 것을 얻는 것이고 그분을 놓치는 것은 모든 것을 잃는 것이다. 하나님께 붙잡혀야 하나님을 붙잡을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 붙잡혀야 예수 그리스도를 붙잡을 수 있다. 그런 사람만 궁극적으로 소망이 있다.

(금, November 28, 2025: secondstepⒸ2025) ※ 전에 썼던 글을 수정하고 보완하여 고쳐 쓰다

바닷가 모래 위의 발걸음 두 개
바닷가 모래 위의 발걸음 두 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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